인권위, 정신병원에 장기간 격리 조치 개선 권고
묶음에 의한 통치가 허용되는 곳이 교도소와 정신병원
예외적 상황에서의 강박 권리는 무의미...그 예외가 일상이 될 수 있어
선진국 지위에 맞는 묶지 않고 치유 모색하는 대안적 치료 찾아야
격리와 강박은 정신보건의 구시대적 유물이다. 얼마나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자의적인 자·타해 위험과 보호의 문제로 격리되고 묶여 왔는가. 사람을 묶는다는 행위는 치료가 아닌 규율과 통제로 이끈다는 의미다. 그것이 비록 병원의 치료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둠은 치료가 아니다.
정신병원 병동의 보호사 두 명은 입원환자였던 기자의 손발을 침대에 묶기 시작했다. 덩치 큰 보호사는 무릎으로 기자의 목을 눌렀다. 아파서 소리를 지르자 다른 보호사가 목을 누르지 말라고 동료 보호사에게 말했다. 그들은 격리실을 떠나기 전에 묶인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앞으로 서로 조심합시다.”
기자는 나이 40세 무렵,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10년 무렵이었다. 기자가 입원한 서울대학교병원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묶지 않았다. 의사들은 기자의 질환적 특성을 설명하며 염려해 주었다.
모든 상급종합병원인 대학병원에서는 서울대병원과 비슷할 정도로 인권에 기반한 치료 철학을 추구하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기자는 서울대병원에서 환자로서, 인간으로서 ‘대접’ 받으며 지냈다. 그런데 이후 가톨릭 계열에서 운영하는 한 병원으로 전원을 했는데 그곳에서 기자는 처음으로 강박이라는 걸 경험했다.
병동 간호사에게 뭔가를 질문했는데 그 간호사는 자신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보호사를 호출했고 보호사 두 명이 기자의 팔을 잡고 어떤 설명도 없이 격리실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주사를 놓은 것 같은데 기자는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보호사들이 와서 기자의 묶인 팔과 다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정신병원을 ‘온전히’ 퇴원했을 때, 기자는 세상의 모든 정신병원이 서울대학병원과 같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정신장애인들과 가족들을 만났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정신병원에서 묶였다”라는 전언이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20대의 청년 당사자가 병동 내 억압적 질서에 항의를 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환자들을 직사각형의 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치료에 대한 토론을 벌이게 했다고 한다. 최소 한 시간 이상 진행되는 토론에서 당사자가 일어서거나 앉아 있는 걸 거부하면 어김없이 보호사들이 와서 그를 의자와 함께 줄로 묶어버렸다. 20대의 청년인 그는 이 억압에 항의를 했다. 물론 묶였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했다. 무엇을? 바로 자신을 묶는 그 보호사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린 것이다. 보호사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고, 그는 다시 보호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십여 차례의 침 뱉음과 얼굴에 가해진 폭행으로 그 20대 청년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기자는 그 상황을 부당한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개인의 불복종 의지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묶는 폭력적 행위는 법에 근거하지 않고는 진행돼서는 안 될 영역이다. 법이 아닌 개인과 집단에 의한 결박과 묶음은 사적 폭력이며 공권력은 이의 실행을 금지하고 있다.
법이 허용하는 감금과 결박의 공간이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교도소일 것이다. 징벌을 목적으로 하는 결박, 독방으로의 격리가 그렇다. 물론 교도소 결박의 경우에도 행위가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이 있다.
강박과 결박의 논리는 정신병원에도 연동된다. 묶는 것 외에 대안적 방법과 수단이 없다고 판단될 때 강박은 합법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물어볼 게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인가 아닌가. 사람을 묶는 신체의 억압은 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 법이 적용되는 범주에 정신장애인도 포함되는 것인가 아닌가. 권력은 약자인 정신장애인과 노인, 발달장애인을 묶으면서 관리하고 훈육하고 통제해왔다.
지난 2018년 11월, 국립법무병원(치료감호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부당하게 과도한 격리를 통해 신체의 자유를 훼손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낸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교도관들은 해당 재소자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리고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강박했으며 이는 정당한 치료행위라고 주장했다.
당시 인권위는 “교도관들이 강박의 사유와 상관없이 가장 높은 수준의 강박 형태인 ‘5포인트’의 강도로 묶었다”며 “신체 제한은 치료감호 등의 법률에 따라 자·타해 위험이 뚜렷하고 위험 회피가 어려울 경우에만 시행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뼈아픈 건 이논리가 정신병원에도 연동된다는 점이다. 자·타해 위험이 뚜렷할 경우와 위험 회피가 어려울 경우에 강박은 ‘정당화’된다. 보건복지부의 ‘격리 및 강박지침’은 치료의 필요성과 더불어 불가피한 경우에 -이는 예외의 적용이다- 제한적으로 격리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묶는 것 외에 대안적 방법과 수단이 없다고 판단될 때 강박은 합법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물어볼 게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인가 아닌가. 사람을 묶는 신체의 억압은 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 법이 적용되는 범주에 정신장애인도 포함되는 것인가 아닌가.
물론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범죄인, 혹은 잠재적 범죄자의 표상으로 해석돼 묶이는 것은 지금껏 의료 행위에서 지극히 정상적 행위로 취급돼 왔다. 이 묶임은 비단 정신병동뿐만 아니라 노인요양시설에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문제다. 노인이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자꾸 움직이려고 할 때, 요양원은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노인을 묶어버린다. 노인이 죄인인가 아닌가. 어쩌면 시설의 발달장애인들도 묶이고 있을 것이다. 권력은 약자인 정신장애인과 노인, 발달장애인을 묶으면서 관리하고 훈육하고 통제해왔다.
복지부 지침은 치료상 불가피한 경우, 즉 ‘예외’ 상황에서의 강박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예외의 상황은 해석하는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점이 다시 문제가 된다. 정신병원이 가진 은밀함과 폐쇄성은 권력 주체가 이 예외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기자가 당했듯이, 간호사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 여지없이 묶이게 되는 것이다.
복지부 지침은 주치의가 환자 강박 전후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1시간마다 활력 징후(바이털 체크)를 점검하고 2시간마다 팔·다리를 움직여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1시간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자세를 변경해주기, 음료수를 적절하게 공급하도록 권한다.
불행한 건 이 말도 되지 않고, 지켜지지도 않을 강박 지침이 정신장애인의 내면에 더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점이다. 범죄인도 아닌 정신장애인의 묶임이 타당하다는 관점은 정신병원이 통제와 억압과 훈육의 공간임을 역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병원의 폭력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 역시 없었다. 그러므로 강박을 한들, 폭력을 행사한들 무슨 상관이랴.
미셸 푸코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가장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싫어하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병원이고 또 하나는 감옥이다. 푸코는 “이는 두 장소가 혐오와 두려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니 혐오스런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박은 정신병동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병원의 신체 역할을 하는 보호사들에 의해서.
게다가 정신병원 보호사들의 자격 조건은 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면 가능하다. 정신건강복지법에도 보호사의 자격과 직무 범위에 대한 규정은 없다. 어쩌면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박은 이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하다못해 장례지도사가 되려 해도 관련 대학을 나오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정신이 아픈 살아있는 존재들을 대하는 이들이 자격 없이 체격만으로 보호사가 될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혐오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c)연합뉴스
복지부 지침은 강박을 최대 4시간으로 하고 8시간을 초과할 경우 전문의 대면 평가를 하도록 했다. 이는 전문의 평가가 있으면 더 오랜 시간 묶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초과된 묶임으로 인해 정신장애인은 치료받으러 들어간 공간에서 사망하고 은폐되고 사라진다. 폐동맥혈전색전증 등 이름도 어려운 질환으로 말이다. 정신병원의 은폐성이 가진 강박의 민낯이다.
17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물건을 훔친 환자를 치료와 보호 목적이 아닌 징벌적 목적으로 장기간 격리 조치한 것에 대한 진정에 대해 해당 정신병원이 인권위 권고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병원 측은 “정신건강복지법과 보건복지부 ‘격리 및 강박지침’을 준수해 치료와 보호상 불가피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격리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했으며 직원들 대상으로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고 인권위에 회신했다.
흔히 정신병원에서의 격리와 강박은 ‘불가피한’ 예외적 상황에서만 진행된다고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외적 상황’이 도대체 언제인지, 이 예외가 정신병원 내부에서는 왜 일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예외의 일상화는 폭력과 억압이 정상이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묶는 것이 예외이지만 감시와 감독이 없는 그 묶음은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침에 나오는 ‘1시간마다 바이털 체크를 하고 2시간마다 몸을 돌려주라’는 건 사람을 때리면서 1시간마다 얼굴과 몸에 멍이 들었는지, 아니면 코피가 흐르는지 확인하고, 2시간마다 상처에 약을 발라줘야 한다는 의미와 같은 일그러진 치료 문법일 뿐이다.
격리와 강박은 정신보건의 구시대적 유물이다. 얼마나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자의적인 자·타해 위험과 보호의 문제로 격리되고 묶여 왔는가. 사람을 묶는다는 행위는 치료가 아닌 규율과 통제로 이끈다는 의미다. 그것이 비록 병원의 치료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둠은 치료가 아니다. 예외적으로 강박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은 삭제돼야 한다. 전면적 금지가 돼야 한다. 우리는 인권에 기반한 대안적 치료 방법을 찾아야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인권위, 정신병원에 장기간 격리 조치 개선 권고
묶음에 의한 통치가 허용되는 곳이 교도소와 정신병원
예외적 상황에서의 강박 권리는 무의미...그 예외가 일상이 될 수 있어
선진국 지위에 맞는 묶지 않고 치유 모색하는 대안적 치료 찾아야
격리와 강박은 정신보건의 구시대적 유물이다. 얼마나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자의적인 자·타해 위험과 보호의 문제로 격리되고 묶여 왔는가. 사람을 묶는다는 행위는 치료가 아닌 규율과 통제로 이끈다는 의미다. 그것이 비록 병원의 치료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둠은 치료가 아니다.
정신병원 병동의 보호사 두 명은 입원환자였던 기자의 손발을 침대에 묶기 시작했다. 덩치 큰 보호사는 무릎으로 기자의 목을 눌렀다. 아파서 소리를 지르자 다른 보호사가 목을 누르지 말라고 동료 보호사에게 말했다. 그들은 격리실을 떠나기 전에 묶인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앞으로 서로 조심합시다.”
기자는 나이 40세 무렵,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10년 무렵이었다. 기자가 입원한 서울대학교병원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묶지 않았다. 의사들은 기자의 질환적 특성을 설명하며 염려해 주었다.
모든 상급종합병원인 대학병원에서는 서울대병원과 비슷할 정도로 인권에 기반한 치료 철학을 추구하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기자는 서울대병원에서 환자로서, 인간으로서 ‘대접’ 받으며 지냈다. 그런데 이후 가톨릭 계열에서 운영하는 한 병원으로 전원을 했는데 그곳에서 기자는 처음으로 강박이라는 걸 경험했다.
병동 간호사에게 뭔가를 질문했는데 그 간호사는 자신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보호사를 호출했고 보호사 두 명이 기자의 팔을 잡고 어떤 설명도 없이 격리실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주사를 놓은 것 같은데 기자는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보호사들이 와서 기자의 묶인 팔과 다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정신병원을 ‘온전히’ 퇴원했을 때, 기자는 세상의 모든 정신병원이 서울대학병원과 같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정신장애인들과 가족들을 만났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정신병원에서 묶였다”라는 전언이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20대의 청년 당사자가 병동 내 억압적 질서에 항의를 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환자들을 직사각형의 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치료에 대한 토론을 벌이게 했다고 한다. 최소 한 시간 이상 진행되는 토론에서 당사자가 일어서거나 앉아 있는 걸 거부하면 어김없이 보호사들이 와서 그를 의자와 함께 줄로 묶어버렸다. 20대의 청년인 그는 이 억압에 항의를 했다. 물론 묶였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했다. 무엇을? 바로 자신을 묶는 그 보호사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린 것이다. 보호사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고, 그는 다시 보호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십여 차례의 침 뱉음과 얼굴에 가해진 폭행으로 그 20대 청년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기자는 그 상황을 부당한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개인의 불복종 의지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묶는 폭력적 행위는 법에 근거하지 않고는 진행돼서는 안 될 영역이다. 법이 아닌 개인과 집단에 의한 결박과 묶음은 사적 폭력이며 공권력은 이의 실행을 금지하고 있다.
법이 허용하는 감금과 결박의 공간이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교도소일 것이다. 징벌을 목적으로 하는 결박, 독방으로의 격리가 그렇다. 물론 교도소 결박의 경우에도 행위가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이 있다.
강박과 결박의 논리는 정신병원에도 연동된다. 묶는 것 외에 대안적 방법과 수단이 없다고 판단될 때 강박은 합법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물어볼 게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인가 아닌가. 사람을 묶는 신체의 억압은 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 법이 적용되는 범주에 정신장애인도 포함되는 것인가 아닌가. 권력은 약자인 정신장애인과 노인, 발달장애인을 묶으면서 관리하고 훈육하고 통제해왔다.
지난 2018년 11월, 국립법무병원(치료감호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부당하게 과도한 격리를 통해 신체의 자유를 훼손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낸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교도관들은 해당 재소자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리고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강박했으며 이는 정당한 치료행위라고 주장했다.
당시 인권위는 “교도관들이 강박의 사유와 상관없이 가장 높은 수준의 강박 형태인 ‘5포인트’의 강도로 묶었다”며 “신체 제한은 치료감호 등의 법률에 따라 자·타해 위험이 뚜렷하고 위험 회피가 어려울 경우에만 시행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뼈아픈 건 이논리가 정신병원에도 연동된다는 점이다. 자·타해 위험이 뚜렷할 경우와 위험 회피가 어려울 경우에 강박은 ‘정당화’된다. 보건복지부의 ‘격리 및 강박지침’은 치료의 필요성과 더불어 불가피한 경우에 -이는 예외의 적용이다- 제한적으로 격리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묶는 것 외에 대안적 방법과 수단이 없다고 판단될 때 강박은 합법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물어볼 게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인가 아닌가. 사람을 묶는 신체의 억압은 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 법이 적용되는 범주에 정신장애인도 포함되는 것인가 아닌가.
물론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범죄인, 혹은 잠재적 범죄자의 표상으로 해석돼 묶이는 것은 지금껏 의료 행위에서 지극히 정상적 행위로 취급돼 왔다. 이 묶임은 비단 정신병동뿐만 아니라 노인요양시설에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문제다. 노인이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자꾸 움직이려고 할 때, 요양원은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노인을 묶어버린다. 노인이 죄인인가 아닌가. 어쩌면 시설의 발달장애인들도 묶이고 있을 것이다. 권력은 약자인 정신장애인과 노인, 발달장애인을 묶으면서 관리하고 훈육하고 통제해왔다.
복지부 지침은 치료상 불가피한 경우, 즉 ‘예외’ 상황에서의 강박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예외의 상황은 해석하는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점이 다시 문제가 된다. 정신병원이 가진 은밀함과 폐쇄성은 권력 주체가 이 예외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기자가 당했듯이, 간호사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 여지없이 묶이게 되는 것이다.
복지부 지침은 주치의가 환자 강박 전후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1시간마다 활력 징후(바이털 체크)를 점검하고 2시간마다 팔·다리를 움직여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1시간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자세를 변경해주기, 음료수를 적절하게 공급하도록 권한다.
불행한 건 이 말도 되지 않고, 지켜지지도 않을 강박 지침이 정신장애인의 내면에 더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점이다. 범죄인도 아닌 정신장애인의 묶임이 타당하다는 관점은 정신병원이 통제와 억압과 훈육의 공간임을 역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병원의 폭력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 역시 없었다. 그러므로 강박을 한들, 폭력을 행사한들 무슨 상관이랴.
미셸 푸코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가장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싫어하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병원이고 또 하나는 감옥이다. 푸코는 “이는 두 장소가 혐오와 두려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니 혐오스런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박은 정신병동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병원의 신체 역할을 하는 보호사들에 의해서.
게다가 정신병원 보호사들의 자격 조건은 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면 가능하다. 정신건강복지법에도 보호사의 자격과 직무 범위에 대한 규정은 없다. 어쩌면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박은 이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하다못해 장례지도사가 되려 해도 관련 대학을 나오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정신이 아픈 살아있는 존재들을 대하는 이들이 자격 없이 체격만으로 보호사가 될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혐오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c)연합뉴스
복지부 지침은 강박을 최대 4시간으로 하고 8시간을 초과할 경우 전문의 대면 평가를 하도록 했다. 이는 전문의 평가가 있으면 더 오랜 시간 묶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초과된 묶임으로 인해 정신장애인은 치료받으러 들어간 공간에서 사망하고 은폐되고 사라진다. 폐동맥혈전색전증 등 이름도 어려운 질환으로 말이다. 정신병원의 은폐성이 가진 강박의 민낯이다.
17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물건을 훔친 환자를 치료와 보호 목적이 아닌 징벌적 목적으로 장기간 격리 조치한 것에 대한 진정에 대해 해당 정신병원이 인권위 권고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병원 측은 “정신건강복지법과 보건복지부 ‘격리 및 강박지침’을 준수해 치료와 보호상 불가피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격리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했으며 직원들 대상으로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고 인권위에 회신했다.
흔히 정신병원에서의 격리와 강박은 ‘불가피한’ 예외적 상황에서만 진행된다고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외적 상황’이 도대체 언제인지, 이 예외가 정신병원 내부에서는 왜 일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예외의 일상화는 폭력과 억압이 정상이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묶는 것이 예외이지만 감시와 감독이 없는 그 묶음은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침에 나오는 ‘1시간마다 바이털 체크를 하고 2시간마다 몸을 돌려주라’는 건 사람을 때리면서 1시간마다 얼굴과 몸에 멍이 들었는지, 아니면 코피가 흐르는지 확인하고, 2시간마다 상처에 약을 발라줘야 한다는 의미와 같은 일그러진 치료 문법일 뿐이다.
격리와 강박은 정신보건의 구시대적 유물이다. 얼마나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자의적인 자·타해 위험과 보호의 문제로 격리되고 묶여 왔는가. 사람을 묶는다는 행위는 치료가 아닌 규율과 통제로 이끈다는 의미다. 그것이 비록 병원의 치료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둠은 치료가 아니다. 예외적으로 강박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은 삭제돼야 한다. 전면적 금지가 돼야 한다. 우리는 인권에 기반한 대안적 치료 방법을 찾아야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