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종 “임대주택서 정신질환자 많이 나와...문제시 격리해야”
성 의원이 약자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선민의식 드러나
국가책임제가 사람을 가두라는 의미인가?...정신장애인에 사과해야
사진=유튜브 성일종TV 화면 갈무리
그의 발언이 실린 기사를 읽으며 기자는 “미친”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기자 또한 정신장애인이기에 ‘미친’ 발언이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용어 외에는 기자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대안적 발언이 없었다. 독자들의 혜량을 바란다.
9일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서울시당 6.1지방선거 당선자 대회 및 워크숍’에서 임대주택 거주환경을 지적하며 “방치할 수 없다. 사회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주치의 제도를 운영해서 자연스럽게 (임대주택 단지 등을) 돌면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상담해야 한다”며 “그분(정신질환자)들을 격리하는 조치들을 사전적으로 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가 정신질환자 국가책임제의 의미를 국가가 이들을 격리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해석한데다 이들을 선제적으로 격리해야 한다는 망언은 정신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 깊은 상처와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일종이 “격리조치를 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발언의 맥락은 그의 내면에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정신질환자는 ‘더럽고’, ‘위험하고’, ‘불결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사람을 살해하고’, ‘범죄를 수시로 저지르고’, 사회적으로 아무 존재 의미가 없는 이들일 것이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이 개념 없는 발언들을 보면 그의 장애인권 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게 구성돼 있는지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신장애인을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는 이 무식한 발언을 할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한민국에 정신요양시설과 정신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8만여 명이다. 이들은 성일종의 말처럼 국가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이들은 아팠고, 외로웠고, 병적 징후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힘겨워서 치료와 치유를 위해 가둠으로 대변되는 그 공간에 있는 것이다.
성일종은 정신질환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천박하고 유령 같은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파시스트적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에 대해 국가는 돌봄이 아닌 시설과 병원에서 격리돼 살아가야 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사회의 어디에도 이들의 인권과 권리, 존엄을 담보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이들은 그냥 갇혀서 ‘사육돼’ 살아왔다.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는 더 오랜 기간 동안 정신과 권력인 의사가 제공하는 약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해 인간으로서 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규정돼 왔다.
성일종. 당신의 발언은 정신질환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갇혀 있다가 죽어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약자의 버거운 삶에 대한 고민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권력의 최상부에서 단물을 빨아먹으며 살아온 당신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과 개인의 아픔과 부당한 상처를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인간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정책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쉽게 ‘격리’라는 발언을 할 수 있는지, 당신 손을 가슴에 대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사진=성일종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조현병이든 조울증이든 정신장애인이 사건·사고를 일으키면 사회는 그 문제의 맥락을 무시한 채 공분하고 이 광기의 분노들이 향하는 목소리는 단 하나로 귀결된다: “가두고 사회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여태껏 언론이 그렇게 유도했고 이 몹쓸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합의가 된 것처럼 정신질환자를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내왔다. 성일종, 당신은 아는가. 우리 정신장애인들도 공동체에서 존중받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
당신은 임대주택에 정신질환자가 많이 살고 이들이 ‘사고’를 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의미로 발언했다. 그래서 “(임대주택에) 정신질환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쪽에서 그런 환자들의 발생 빈도가 높다”고 말했다.
가족 중 한 명이 정신질환에 걸리면 가족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굿도 하고, 종교 의식도 해 보고, 기도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또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악순환의 구조는 겪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 수가 없다.
그간 국가는 정신장애인 보호 정책을 격리의 관점에서 봐 왔지 지역사회에서의 비정신장애인들과의 공생을 고민해 오지 않았다.
성일종,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의 원 의미는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에게 쉼을 주고 가족을 교육하고 국가가 회복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갈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취업훈련도 받고 교육도 받으면서 사회에 통합되는 정책들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국가책임제를 당신은 “격리”라는 한 마디로 정의해 버렸다. 무지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는지.
당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신건강복지법이라는 정신장애와 관련된 특별법이 있다. 이 법 제2조 기본 이념은 “모든 정신장애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고 최적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지 않으며 정신병원 입원보다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가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원칙을 밝히고 있다.
또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이 법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한다.
당신도 알듯이 우리 헌법 제10조는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못박고 있다. 당신은 헌법이 규정한 ‘존엄’에 정신장애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것인가.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이 돌봄의 무게에 눌려 있다가 정신장애인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조사해보기 바란다. 국가책임제는 어떤 경우에도 “정신질환자를 가둬서 통제하고 훈육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지 않았다. 성일종, 당신이 생각하는 그 ‘격리’의 시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있다. 당신이 “생활이 어려운 쪽에서 그런 (정신질환자들) 환자들의 발생 빈도가 높다”고 했는데 가난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에 걸리는 게 아니라 정신질환을 갖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의료비와 돌봄으로 인한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치솟는 주택값을 지불한 능력은 없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대주택 살기 때문에 정신질환이 걸린다? 이 몰상식한 발언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당신이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그 천박한 우월론과 선민의식이 개입된 것이라 유추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일종 정책위의장. 당신은 정신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보기 바란다. 그들에게서 당신의 입으로 말한 ‘격리’를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할 때 가족들이 그에 동의할지, 아니면 박수를 칠지, 아니면 비난을 할지를.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을 만나 한 번 더 그 ‘격리’를 말해보라. 정신장애인들이 당신의 발언에 호응할지 어떨지를.
인간은 인간이기에 존엄은 뺏길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정신장애인이 어디 외계에서 떨어져 나온 불가사의하고 이질적인 존재인가. 이들도 시민사회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이며 육체가 병들면 병원에 가듯이 정신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 그러나 신체적 질병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병원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치료가 되면 다 집으로 돌아간다. 즉 자의적 입원에 의해 자의적 퇴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은 정신과적 응급상황이 오면 어떤 치료의 대안적 방안 없이 사설구급대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들어가고 거기서 반항을 하지 못하게 코끼리도 맞으면 쓰러진다는 ‘코끼리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는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 즉 의사가 그 결정권을 쥐고 있다. 그걸 강제입원이라고 한다.
성일종. 당신도 한 번 그 주사를 맞아보라. 그럼 정신장애인이 왜 그토록 정신병원을 가기 싫어하는지를 그 순간 알게 될 것이니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는 존재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심신이 안정되면 바로 퇴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신체장애는 그 퇴원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입원 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벨기에가 입원 기간이 9일이라면 우리나라는 180일 이상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들이 오랜 기간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병원 권력이 부당하게 요구하는 일들을 해야 하고 때로는 그 권력자의 의지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침대에 사지가 묶여 사나흘 동안 하얀 천장만 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우리가 묶여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묶여야 하는가.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는 저렇게 묶어서라도 정신장애인들은 통제해야 한다는, 그 비열한 사유에서 나온 정치적 발화가 아닌가.
정신장애인들은 당신이 “임대주택에 못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신질환자들이 나온다”라는 그 발언은, 도대체 어떻게 분석하길래 이런 오류투성이의 결론을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사진=성일종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못사는 사람의 사는 곳이 임대주택이고 그곳에 오래 거주하게 되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임대주택과 마주한 민간주택 거주민들은 임대주택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아이들을 교육한다. 부당한 차별에 임대주택 거주민들이 항의하지 못하는 건 사회적 권력이 없는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성일종, 당신이 임대주택과 그 거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지 않을까. 못사는 이들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그것 말이다.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정신장애인을 더 타자화하고 배제하지 말라. “임대주택 거주자들이 술 먹고 난동을 더 부리거나 문제가 있다”라는 발언 역시 성일종 당신의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바라보는 원형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가난한 자들은 싸운다. 술 먹고 고함도 지르고 당신 말처럼 ‘난동’을 부린다. 그래서?
일반 아파트보다 임대아파트에서 그런 존재들이 많다면 당신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를, 정치인이라면, 그 시선에서 접근해야 하는 거 아닌가. 퍼준다는 의미가 좋지 않다면 그 불완전한 사회환경을 어떻게 개조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까에 대한 공적 의지로 다가가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말한 ‘임대주택 인간들이 문제가 많다’는 건 잘사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혐오의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과하라.
무엇보다, 나는 당신의 해명을 듣기 전에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시인 김수영은 자유의 전면적 허용을 요구하는 자신의 의지에 한 평론가가 지적을 하자 다시 글을 쓴다. 문학은 어차피 불온한 거라고. 그러자 평론가는 그렇다면 불온성만으로 문학이 완성되는 건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수영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얼굴에 침을, 침을 뱉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나에게 침을 뱉기 전에. 보라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지 않은가”라고.
문학의 불온성을 옹호하고자 했던 김수영은 인간의 본질은 존엄이며 이 존엄이 훼손될 때 언제든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영원한 자유의 테마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는 이 글을 쓰면서 깊은 분노를 삭이고 있다. 그래서 성일종, 당신에게 말한다. “내가 할 일은 우선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보라. 당신은 가난한 자, 약자의 삶을 고민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성일종, 당신은 정치인이다. 국민이 부여한 공적 권력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차별적이고 배타적이고 모멸적인 언사를 행사했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사회적 약자의 삶의 고통을, 슬픔을,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존재론적 아픔을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 한 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온 존재는 아니다.
진정으로 사과하라. <마인드포스트>와 정신장애인 운동진영은 당신이 사과할 때까지 당신의 행위들을 지켜볼 것이다.
성일종 “임대주택서 정신질환자 많이 나와...문제시 격리해야”
성 의원이 약자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선민의식 드러나
국가책임제가 사람을 가두라는 의미인가?...정신장애인에 사과해야
사진=유튜브 성일종TV 화면 갈무리
그의 발언이 실린 기사를 읽으며 기자는 “미친”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기자 또한 정신장애인이기에 ‘미친’ 발언이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용어 외에는 기자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대안적 발언이 없었다. 독자들의 혜량을 바란다.
9일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서울시당 6.1지방선거 당선자 대회 및 워크숍’에서 임대주택 거주환경을 지적하며 “방치할 수 없다. 사회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주치의 제도를 운영해서 자연스럽게 (임대주택 단지 등을) 돌면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상담해야 한다”며 “그분(정신질환자)들을 격리하는 조치들을 사전적으로 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가 정신질환자 국가책임제의 의미를 국가가 이들을 격리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해석한데다 이들을 선제적으로 격리해야 한다는 망언은 정신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 깊은 상처와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일종이 “격리조치를 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발언의 맥락은 그의 내면에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정신질환자는 ‘더럽고’, ‘위험하고’, ‘불결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사람을 살해하고’, ‘범죄를 수시로 저지르고’, 사회적으로 아무 존재 의미가 없는 이들일 것이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이 개념 없는 발언들을 보면 그의 장애인권 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게 구성돼 있는지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신장애인을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는 이 무식한 발언을 할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한민국에 정신요양시설과 정신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8만여 명이다. 이들은 성일종의 말처럼 국가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이들은 아팠고, 외로웠고, 병적 징후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힘겨워서 치료와 치유를 위해 가둠으로 대변되는 그 공간에 있는 것이다.
성일종은 정신질환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천박하고 유령 같은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파시스트적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에 대해 국가는 돌봄이 아닌 시설과 병원에서 격리돼 살아가야 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사회의 어디에도 이들의 인권과 권리, 존엄을 담보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이들은 그냥 갇혀서 ‘사육돼’ 살아왔다.
정신질환자(정신장애인)는 더 오랜 기간 동안 정신과 권력인 의사가 제공하는 약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해 인간으로서 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규정돼 왔다.
성일종. 당신의 발언은 정신질환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갇혀 있다가 죽어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약자의 버거운 삶에 대한 고민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권력의 최상부에서 단물을 빨아먹으며 살아온 당신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과 개인의 아픔과 부당한 상처를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인간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정책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쉽게 ‘격리’라는 발언을 할 수 있는지, 당신 손을 가슴에 대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사진=성일종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조현병이든 조울증이든 정신장애인이 사건·사고를 일으키면 사회는 그 문제의 맥락을 무시한 채 공분하고 이 광기의 분노들이 향하는 목소리는 단 하나로 귀결된다: “가두고 사회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여태껏 언론이 그렇게 유도했고 이 몹쓸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합의가 된 것처럼 정신질환자를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내왔다. 성일종, 당신은 아는가. 우리 정신장애인들도 공동체에서 존중받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
당신은 임대주택에 정신질환자가 많이 살고 이들이 ‘사고’를 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의미로 발언했다. 그래서 “(임대주택에) 정신질환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쪽에서 그런 환자들의 발생 빈도가 높다”고 말했다.
가족 중 한 명이 정신질환에 걸리면 가족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굿도 하고, 종교 의식도 해 보고, 기도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또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악순환의 구조는 겪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 수가 없다.
그간 국가는 정신장애인 보호 정책을 격리의 관점에서 봐 왔지 지역사회에서의 비정신장애인들과의 공생을 고민해 오지 않았다.
성일종,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의 원 의미는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에게 쉼을 주고 가족을 교육하고 국가가 회복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갈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취업훈련도 받고 교육도 받으면서 사회에 통합되는 정책들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국가책임제를 당신은 “격리”라는 한 마디로 정의해 버렸다. 무지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는지.
당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신건강복지법이라는 정신장애와 관련된 특별법이 있다. 이 법 제2조 기본 이념은 “모든 정신장애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고 최적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지 않으며 정신병원 입원보다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가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원칙을 밝히고 있다.
또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이 법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한다.
당신도 알듯이 우리 헌법 제10조는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못박고 있다. 당신은 헌법이 규정한 ‘존엄’에 정신장애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것인가.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이 돌봄의 무게에 눌려 있다가 정신장애인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조사해보기 바란다. 국가책임제는 어떤 경우에도 “정신질환자를 가둬서 통제하고 훈육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지 않았다. 성일종, 당신이 생각하는 그 ‘격리’의 시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있다. 당신이 “생활이 어려운 쪽에서 그런 (정신질환자들) 환자들의 발생 빈도가 높다”고 했는데 가난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에 걸리는 게 아니라 정신질환을 갖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의료비와 돌봄으로 인한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치솟는 주택값을 지불한 능력은 없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대주택 살기 때문에 정신질환이 걸린다? 이 몰상식한 발언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당신이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그 천박한 우월론과 선민의식이 개입된 것이라 유추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일종 정책위의장. 당신은 정신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보기 바란다. 그들에게서 당신의 입으로 말한 ‘격리’를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할 때 가족들이 그에 동의할지, 아니면 박수를 칠지, 아니면 비난을 할지를.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을 만나 한 번 더 그 ‘격리’를 말해보라. 정신장애인들이 당신의 발언에 호응할지 어떨지를.
인간은 인간이기에 존엄은 뺏길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정신장애인이 어디 외계에서 떨어져 나온 불가사의하고 이질적인 존재인가. 이들도 시민사회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이며 육체가 병들면 병원에 가듯이 정신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 그러나 신체적 질병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병원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치료가 되면 다 집으로 돌아간다. 즉 자의적 입원에 의해 자의적 퇴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은 정신과적 응급상황이 오면 어떤 치료의 대안적 방안 없이 사설구급대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들어가고 거기서 반항을 하지 못하게 코끼리도 맞으면 쓰러진다는 ‘코끼리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는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 즉 의사가 그 결정권을 쥐고 있다. 그걸 강제입원이라고 한다.
성일종. 당신도 한 번 그 주사를 맞아보라. 그럼 정신장애인이 왜 그토록 정신병원을 가기 싫어하는지를 그 순간 알게 될 것이니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는 존재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심신이 안정되면 바로 퇴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신체장애는 그 퇴원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입원 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벨기에가 입원 기간이 9일이라면 우리나라는 180일 이상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들이 오랜 기간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병원 권력이 부당하게 요구하는 일들을 해야 하고 때로는 그 권력자의 의지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침대에 사지가 묶여 사나흘 동안 하얀 천장만 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우리가 묶여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묶여야 하는가.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는 저렇게 묶어서라도 정신장애인들은 통제해야 한다는, 그 비열한 사유에서 나온 정치적 발화가 아닌가.
정신장애인들은 당신이 “임대주택에 못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신질환자들이 나온다”라는 그 발언은, 도대체 어떻게 분석하길래 이런 오류투성이의 결론을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사진=성일종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못사는 사람의 사는 곳이 임대주택이고 그곳에 오래 거주하게 되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임대주택과 마주한 민간주택 거주민들은 임대주택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아이들을 교육한다. 부당한 차별에 임대주택 거주민들이 항의하지 못하는 건 사회적 권력이 없는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성일종, 당신이 임대주택과 그 거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지 않을까. 못사는 이들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그것 말이다.
당신이 말한 국가책임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정신장애인을 더 타자화하고 배제하지 말라. “임대주택 거주자들이 술 먹고 난동을 더 부리거나 문제가 있다”라는 발언 역시 성일종 당신의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바라보는 원형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가난한 자들은 싸운다. 술 먹고 고함도 지르고 당신 말처럼 ‘난동’을 부린다. 그래서?
일반 아파트보다 임대아파트에서 그런 존재들이 많다면 당신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를, 정치인이라면, 그 시선에서 접근해야 하는 거 아닌가. 퍼준다는 의미가 좋지 않다면 그 불완전한 사회환경을 어떻게 개조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까에 대한 공적 의지로 다가가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말한 ‘임대주택 인간들이 문제가 많다’는 건 잘사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혐오의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과하라.
무엇보다, 나는 당신의 해명을 듣기 전에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시인 김수영은 자유의 전면적 허용을 요구하는 자신의 의지에 한 평론가가 지적을 하자 다시 글을 쓴다. 문학은 어차피 불온한 거라고. 그러자 평론가는 그렇다면 불온성만으로 문학이 완성되는 건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수영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얼굴에 침을, 침을 뱉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나에게 침을 뱉기 전에. 보라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지 않은가”라고.
문학의 불온성을 옹호하고자 했던 김수영은 인간의 본질은 존엄이며 이 존엄이 훼손될 때 언제든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영원한 자유의 테마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는 이 글을 쓰면서 깊은 분노를 삭이고 있다. 그래서 성일종, 당신에게 말한다. “내가 할 일은 우선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보라. 당신은 가난한 자, 약자의 삶을 고민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성일종, 당신은 정치인이다. 국민이 부여한 공적 권력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차별적이고 배타적이고 모멸적인 언사를 행사했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사회적 약자의 삶의 고통을, 슬픔을,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존재론적 아픔을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 한 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온 존재는 아니다.
진정으로 사과하라. <마인드포스트>와 정신장애인 운동진영은 당신이 사과할 때까지 당신의 행위들을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