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민음사
‘우영우’가 천재라고 해서 모든 자폐인과 그 가족이 희망을 가질 순 없다. 오히려 더 심란해질 수도 있다. 저렇게 재능 있고 주변에 사랑받는 자폐인이 있다니.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한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는 1992년생 정지음도 이렇게 말한다. “스티브 잡스나 에디슨도 ADHD라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폰이나 전구에 버금가는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동등해진 느낌에 기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전구나 아이폰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지만, 정지음에겐 씩씩함이 충만하다. “나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이는 어릴 적의 발달장애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 서른에 닿은 지금도 집중력과 충동, 주의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조절에 장애를 겪는다.”
이 고백에 이어 그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태어날 줄 몰랐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음이, 좀 더 상냥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에서 이 책이 출발했다.”
내가 이 책에 꽂힌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상냥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자격’. 뭔가 좀 다르고, 뭔가 좀 어긋나 있는 ADHD 환자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 책의 목표는 200%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정지음의 유쾌하고 발랄한 문장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다.
정지음, 젊은 ADHD의 슬픔, 민음사, 2021
가령, 책에 소개된 ADHD 자가진단 문항과 이에 대한 작가의 답변을 보자.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내게 일의 순서를 만들라는 건 온 우주의 행성을 국민체조 대형으로 정렬해 보라는 것과 같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결과적으로 안 된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ADHD 환자는 어떤 일에도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과몰입하는 사람을 말한다. (…) 그래서 나의 과몰입은 애먼 집착처럼 보인다. 몰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의 호불호지만, 자신조차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심성이 없어 실수를 많이 한다→“이는 내 묘비석에 한 줄 평처럼 새겨져도 반박할 수 없는 문장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나는 천국에 도착하는 즉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태어나 버릴 것 같다”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나는 좋게 말하면 이야기보따리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장 난 라디오다”
▲돈을 충동적으로 쓴다→“나는 어떤 집단에서든 소액을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이다. 내 돈은 고장 난 물조리개처럼 줄줄 샌다. 사치 부리지 않는 방식으로”
▲과속, 음주운전 또는 과음을 자주 한다→“단 한번도 운전 법규를 어겨본 적이 없다. 결백한 무면허이기 때문이다. 운전면허를 사양함으로써 수천만 원의 돈을 아꼈다고 믿는다. 그 돈들은 전부 과음하는데 쓰였다. 지금까지 쓴 술값을 모으면 우리 집 한 켠에 소주가 샘솟는 우물 공사도 가능하다” 등등.
‘전두엽 이상’으로 인해 딱한 사연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재치있는 화법에 동화돼 연민에 빠질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마지막 장을 덮고 이런 평가를 내렸다. “질병에 절망하여 주저앉는 게 아니라, 울다가도 뚝 그치고 눈물에서 짠맛을 뽑아 배추라도 절일 기세다. 아무리 좌절의 불꽃으로 가열해도 풀 죽지 않는 위트와 낙관이 탱글탱글한 글발에 감겨 독서의 별미를 선사한다.”
극중 우영우는 미모와 재능을 갖췄기 때문에 자폐인임에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을 얻었노라는 주장도 타당하다. 정지음 역시 탁월한 글솜씨와 빛나는 유머가 있었기에 ‘전두엽 이상’조차 사랑스럽게 그려진 것이지, 실제 ADHD 환자의 일상은 훨씬 비참하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젊은 ADHD 환자의 회복 분투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타공인 받은 결핍과 단점을 가감 없이 드러낼 줄 아는 ‘요즘 젊은이’의 용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자존감까지 결여된 주제에 음침하게 관종 요소를 갖춘 이들이 ADHD를 싫어한다면, 그건 놈들이 우릴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과는 상종을 말고 멀리하자.”
솔직히, 나는 이런 자존감이 없다. 그러니 이런 자존감 쩌는 문장을 외워서라도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봐야겠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⑦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민음사
‘우영우’가 천재라고 해서 모든 자폐인과 그 가족이 희망을 가질 순 없다. 오히려 더 심란해질 수도 있다. 저렇게 재능 있고 주변에 사랑받는 자폐인이 있다니.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한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는 1992년생 정지음도 이렇게 말한다. “스티브 잡스나 에디슨도 ADHD라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폰이나 전구에 버금가는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동등해진 느낌에 기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전구나 아이폰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지만, 정지음에겐 씩씩함이 충만하다. “나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이는 어릴 적의 발달장애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 서른에 닿은 지금도 집중력과 충동, 주의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조절에 장애를 겪는다.”
이 고백에 이어 그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태어날 줄 몰랐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음이, 좀 더 상냥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에서 이 책이 출발했다.”
내가 이 책에 꽂힌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상냥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자격’. 뭔가 좀 다르고, 뭔가 좀 어긋나 있는 ADHD 환자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 책의 목표는 200%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정지음의 유쾌하고 발랄한 문장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다.
정지음, 젊은 ADHD의 슬픔, 민음사, 2021
가령, 책에 소개된 ADHD 자가진단 문항과 이에 대한 작가의 답변을 보자.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내게 일의 순서를 만들라는 건 온 우주의 행성을 국민체조 대형으로 정렬해 보라는 것과 같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결과적으로 안 된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ADHD 환자는 어떤 일에도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과몰입하는 사람을 말한다. (…) 그래서 나의 과몰입은 애먼 집착처럼 보인다. 몰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의 호불호지만, 자신조차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심성이 없어 실수를 많이 한다→“이는 내 묘비석에 한 줄 평처럼 새겨져도 반박할 수 없는 문장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나는 천국에 도착하는 즉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태어나 버릴 것 같다”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나는 좋게 말하면 이야기보따리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장 난 라디오다”
▲돈을 충동적으로 쓴다→“나는 어떤 집단에서든 소액을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이다. 내 돈은 고장 난 물조리개처럼 줄줄 샌다. 사치 부리지 않는 방식으로”
▲과속, 음주운전 또는 과음을 자주 한다→“단 한번도 운전 법규를 어겨본 적이 없다. 결백한 무면허이기 때문이다. 운전면허를 사양함으로써 수천만 원의 돈을 아꼈다고 믿는다. 그 돈들은 전부 과음하는데 쓰였다. 지금까지 쓴 술값을 모으면 우리 집 한 켠에 소주가 샘솟는 우물 공사도 가능하다” 등등.
‘전두엽 이상’으로 인해 딱한 사연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재치있는 화법에 동화돼 연민에 빠질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마지막 장을 덮고 이런 평가를 내렸다. “질병에 절망하여 주저앉는 게 아니라, 울다가도 뚝 그치고 눈물에서 짠맛을 뽑아 배추라도 절일 기세다. 아무리 좌절의 불꽃으로 가열해도 풀 죽지 않는 위트와 낙관이 탱글탱글한 글발에 감겨 독서의 별미를 선사한다.”
극중 우영우는 미모와 재능을 갖췄기 때문에 자폐인임에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을 얻었노라는 주장도 타당하다. 정지음 역시 탁월한 글솜씨와 빛나는 유머가 있었기에 ‘전두엽 이상’조차 사랑스럽게 그려진 것이지, 실제 ADHD 환자의 일상은 훨씬 비참하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젊은 ADHD 환자의 회복 분투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타공인 받은 결핍과 단점을 가감 없이 드러낼 줄 아는 ‘요즘 젊은이’의 용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자존감까지 결여된 주제에 음침하게 관종 요소를 갖춘 이들이 ADHD를 싫어한다면, 그건 놈들이 우릴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과는 상종을 말고 멀리하자.”
솔직히, 나는 이런 자존감이 없다. 그러니 이런 자존감 쩌는 문장을 외워서라도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봐야겠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